사순절 십자가 묵상

1995년 10월 5일 오후 5시경, 한탄강에서 낚시를 하던 한 남자가 숨져있는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숨진 할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손가방에서 유서 한 장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보고 싶은 내 아들 언제나 만나볼까? 87년도에 외국으로 떠나고, 8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소식 한 장 없네. 전화 한 통이라도 해줄까 하여 기다리다 보니 어미는 70고개를 넘었구나. 살기도 많이 살았다. 어찌하여 생이별을 하게 되었는지. 모든 게 어미 탓이다. 어디가 살든지 몸 건강 하여라.” 편지지 뒷면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유서는 멀리 외국으로 떠난 아들을 8년간 그리워하며 살아온 할머니의 외롭고 고달픈 인생살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은 신문에 실릴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가슴 아픈 건, 그 이후의 사연입니다. 외국에 가서 연락을 끊은 줄만 알았던 비정한 아들이 8년간 소식을 끊고 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모를 잘 모시기 위해 리비아 건설 현장으로 갔다가 2달 만에 그는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 할머니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다른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할머니가 아들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을 받으실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할머니는 죽음을 앞두고도 자식들에게 작은 피해라도 갈까봐 당신의 주민등록증, 경로우대증까지 모두 버린 채, 유서 한 장만을 남기고 강에 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무덤까지 이어지고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러시아의 속담처럼, 모든 어머니의 가슴에는 그런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때로 자식의 입장에서 그 사랑을 흡족하게 받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사랑하는 방법에서 조금 다를지라도, 그 사랑만은 끊이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미 그 사랑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우리는 종종 목마르지 않다는 것 때문에 우리 주변에 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잊고 살곤 합니다. 그러다가 목마름에 직면할 때에야 샘을 찾고, 샘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많이 담겨져 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그 사랑을 이루며 사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묵상하고 바라보는 계절입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목마다에서, 그리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발자국마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 별세할 것’(누가복음 9:31)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신 예수님께서는 ‘굳게 결심하시고’(누가복음 9:51)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죽음을 향하여 가는 걸음! 그것보다 무거운 걸음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굳게 결심하시고 가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주님의 그 발걸음은 분명 고난의 자취입니다. 그러나 그 자취마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순절에 주님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주님의 걸음걸음을 묵상한다면, 그 속에서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샘물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풍성해지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풍성해지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 할수록, 그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우물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때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우리의 삶에서 스스로 작은 사랑의 샘이 되어갑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샘에서 사랑의 우물물을 마신만큼 우리도 누군가에게 내 사랑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그에게 마시게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변에는 그 사랑의 물을 갈급하게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풍성해진 사람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때론 내 안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내는 것이 희생이기에 십자가처럼 느껴질지라도, 그 십자가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내가 짊어지고 가게 될 십자가, 그것이 사랑임을 알기에 그것까지도 즐겁게 질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계절 사순절에 우리의 사랑이 더욱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사랑의 우물이 더욱 풍성해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물을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한이 없는 것처럼, 내 안에도 세상을 향하여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