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전주남성교회 > 은혜의광장

작성일 : 2007-06-21 11:00

익명성의 위험

글쓴이 : 안효관

요즘 우리 사회는 인터넷의 유익성과 위험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없는 생활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인터넷은 우리 생활 깊은 곳에 파고 들어와 있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정보들을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터넷이 우리의 삶에 파괴성을 보인다는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얼마 전에도 한 텔레비전 프로에 나왔던 고등학생이 자살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3개월 만에 자신의 체중을 40kg이나 감량했다는 그 학생은 방송 출연 이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온갖 악플 때문에 고민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암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고 싶어 방송에 출연한 그녀에게 ‘지방 흡입술을 받은 것 아니냐?’ ‘거짓말 아니냐?’는 등 그녀의 체중 감량을 비아냥거리는 악성댓글(악플)이 이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TV에 출연해서 한 인기가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그 가수의 팬들로부터 모욕적인 악성댓글과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가수의 팬들로부터 협박 전화까지 받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인기 가수나 연예인의 자살에 이은 또 하나의 우리 사회의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악플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익명성’ 때문입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익명성은 도덕과 양심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익명성은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폭력성과 파괴력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을 향해 날아가는 비수가 되어 엄청난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아마도 댓글(리플)을 달 때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여 자신이 조금이라도(이름만이라도) 드러나게 된다면 그런 악성 댓글들은 대부분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날 익명성에 자신을 감춘 채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형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군중들의 틈바구니에 자신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름이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명성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감추어놓고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안도에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감추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익명성의 욕구 뒤에는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성향이 그대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의무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도 일부 포기합니다. 예배드리면서 은혜 받으면 된다는 그 한 가지 권리 외에는 다 포기하면서 의무까지 포기합니다.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고, 헌금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봉사나 헌신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교회 내에서 친교를 나눌 필요성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미 교회 밖의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만 드리고 나면 신앙을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그것이 자기기만이요 가지도취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건 단순히 교회생활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의 작은 삶 속에서도 하나님에게조차 익명성을 간직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살고 싶어지는 유혹입니다. 교회당에서는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내 삶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꺼려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 싶어집니다. 교회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의 모습으로 적당하게 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제약받기도 싫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세상의 유행이나 편의성에서 제외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세상의 군중들 사이에 적당하게 뒤섞여진 채 그들의 유행과 흐름을 따라갈 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익명성을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게 더 나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은밀히 행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구제할 때에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은밀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외손이 모르도록 내 자신에게도 익명성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하라고 하셨고, 금식할 때에도 다른 사람이 금식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익명성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뛰어넘는 경건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경건함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조차 익명성은 아닙니다.

예비군복만 입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점잖고 교양 있는 사람도 예비군복만 입으면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거나 평소 하지 않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군중 속에 파묻힌 익명성 때문입니다. 다 똑같아 보이기 때문에 내가 특별나게 행동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 소변을 본다 해도 ‘아무개’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비군이 그랬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감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니까 평소 무의식 속 깊이에 감추고 억눌려 놓았던 반항적인 심리가 표출되는 것입니다. 익명성 속에 자신의 인격이나 품위를 다 팔아먹고 만 것입니다.

신앙은 익명성 속에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사 49:5)는 말씀은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음을 고백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사랑스런 눈으로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을 의식한 감사와 감격의 고백입니다. 익명성으로 사는 신앙인은 이런 감격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익명성은 자신의 의무를 포기한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놀라운 은혜와 기쁨도 함께 포기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익명성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