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기다리는 시대

필리핀에서는 매년 8월 마지막 월요일을 ‘국가 영웅의 날’(National Heroes day)로 지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싸우거나 나라를 빛낸 모든 국가 영웅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공식적으로는 1896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 1863-1897)’가 결성한 카티푸난(독립군)을 기념한다고 합니다.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카티푸난의 설립자이자 초대수령으로, 카티푸난을 이끌고 무장봉기를 일으키지만 내부 항쟁으로 34세 때에 총살을 당하고 맙니다. 같은 시기에 생존했던 민족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의사 ‘호세 리잘(José Rizal, 1861-1986)’은 무장투쟁을 반대하며 스페인의 개혁과 자치운동을 주장하다 스페인 식민지 군에 의해 35세에 처형당하고 맙니다. 리잘 장군이 처형당하면서 필리핀에서는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필리핀 ‘영웅의 날’은 그런 독보적인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모든 영웅들을 함께 추앙하는 날입니다. 지난 2015년 필리핀 아키노 대통령이 영웅의 날 행사에서 한 연설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아키노 대통령은 “국가를 위한 충성은 크거나 작아도 좋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웅이 되어 영웅들이 시작한 투쟁을 이어 받아 조국을 위해 헌신하자.”고 연설을 했습니다.

세상은 영웅을 기대합니다. 영웅이란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의 사람들이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나라가 어렵고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그런 영웅이 나타나 그 사회를 평정하여 안정과 평화를 만들어주길 기대합니다.

영웅을 기대하는 그 심리 저변에는 자신은 영웅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중에야 영웅이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지만, 그 영웅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독립혁명 때의 두 영웅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나 호세 리잘 역시 지금은 영웅으로 추앙을 받지만 혁명을 위해 투쟁하다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아야 했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세상에는 스스로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고난을 감내하는 삶을 살겠다는 욕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영웅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는 항상 큰 유혹이 따릅니다.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앞장서서 투장할 때에 거기에는 힘이 부여됩니다. 그 힘은 때로 권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돈의 힘이나 인기의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권력이나 돈, 인기의 힘은 영웅을 영웅 되지 못하게 하는 유혹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 힘에 빠져들어 스스로 몰락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웅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대의 영웅이십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신 메시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그분 앞에도 수없이 많은 유혹들이 있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바로 전에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인기와 권력의 힘을 얻는 방법을 선택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시고, 대신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며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30대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삶과 행동과 선포된 말씀들은 당시의 기존 세력들이나 권력자들에게 도전이었고,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모함을 당하기도 하시고, 협박을 받으시기도 하셨습니다. 타협이나 회피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디어내었기에 십자가까지 가셔야 했고, 결국 세계의 영웅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웅이신 그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영웅이시라며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하는 우리 역시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만큼 큰 영향력을 미치는 영웅은 아닐지라도 영웅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로 영웅적인 삶을 가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세상의 손짓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로 주님을 닮은 영웅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방해할 것입니다. 그런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우리의 의지가 아닙니다. 매순간 계속되는 세상의 유혹을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이기는 방법은 유혹에 눈길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유혹의 손길과 그 달콤함을 묵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며칠을 굶어 배가 고픈 아이가 빵집 앞에 서서 ‘나는 결코 빵을 훔치지 않을 거야!’라고 아무리 다짐하고 또 다짐할지라도 그 다짐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빵집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긋한 냄새가 계속 그의 마음을 자극하는 한 그 의지는 얼마 못가 꺾이고 맙니다. 배고픈 소년이 빵집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고소한 빵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피하는 것이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빵을 사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영웅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위대한 영웅까지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영웅이 되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퇴락해가는 윤리의식으로 인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말이 아니라 삶의 모습 속에서 작은 영웅다운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세상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고,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 ‘일그러진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정도를 걸으며 올곧게 사는 평범한 삶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우리 시대의 영웅이기 때문입니다.